Superhuman 3개월 써보고 Gmail로 돌아간 이유 - $30/월의 가치
이메일 앱에 월 3만원?
작년 11월, 팀 리드가 Superhuman 초대장을 보내줬다. "PM이면 써봐야지"라는 반쯤 강요 섞인 권유였다. 솔직히 Gmail 무료로 잘 쓰고 있었는데, 이메일 앱에 $30/월이라니. Netflix 프리미엄보다 비싸다.
그래도 써봤다. 정확히 94일. 그리고 지난주 구독을 취소했다.
이 글은 Superhuman을 까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앱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문제는 '잘 만들어진 것'과 '내게 필요한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 3개월이 걸렸다는 거다.
속도라는 마약
Superhuman의 핵심은 속도다. 공식 사이트에서 주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이메일 경험". 과장이 아니었다.
- 앱 실행: 0.3초 (Gmail은 2-3초)
- 이메일 열기: 즉시 (Gmail은 0.5-1초)
- 검색 결과: 0.1초 (Gmail은 1-2초)
- 키보드 단축키: 모든 동작이 1키 이내
처음 2주는 정말 짜릿했다. Cmd+K로 검색, E로 아카이브, H로 알림 설정. 마우스를 거의 안 썼다. 평균 이메일 처리 시간이 하루 45분에서 28분으로 줄었다. 약 40% 감소.
PM으로서 하루 평균 80-120개 이메일을 받는다. 디자이너, 개발자, 마케터, 경영진... 모두가 이메일로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이메일이 곧 업무 흐름이다.
Superhuman은 이 흐름을 가속화했다. 문제는 '가속'이 항상 좋은 건 아니라는 거다.
효율의 함정
한 달쯤 지나자 이상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더 빨리 처리하니까, 더 많이 확인하게 됐다. 하루 20-30번 확인하던 게 50번 이상으로 늘었다. 앱이 빠르니까 "잠깐만 확인"이 정말 잠깐이 됐고, 그게 습관이 됐다.
Superhuman의 '트리아지(Triage)' 기능은 천재적이다. Inbox Zero를 게임처럼 만들어버렸다. 매일 아침 Cmd+Shift+K로 트리아지 모드 진입, 쓱쓱 정리. 보통 15분 안에 받은편지함을 비운다.
근데 Inbox Zero가 목표가 됐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 날 디자이너가 물었다. "지난주 제가 보낸 프로토타입 피드백 메일 보셨어요?" 봤다. 아카이브했다. 근데 답장을 안 했다. 처리했지만 대응하지 않았다.
PM 업무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메일은 처리 대상이 아니라 대화다. Superhuman은 나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데이터를 봤다:
- Superhuman 사용 전 평균 응답 시간: 4.2시간
- Superhuman 사용 중 평균 응답 시간: 6.8시간
- 3줄 이상 답장 비율: 42% → 23%
빨라졌는데 느려졌다. 효율적인데 효과적이지 않았다.
Gmail의 '불편함'이 주는 것
Gmail로 돌아왔다. 처음 며칠은 답답했다. 로딩 시간, 클릭해야 하는 버튼들, 검색 속도. 모든 게 느렸다.
근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느리니까 덜 확인하게 됐다. 하루 50번이 다시 20번으로. 그 시간에 디자인 리뷰를 더 꼼꼼히 했고, 개발팀 스탠드업에 더 집중했다.
Gmail의 스마트 답장은 Superhuman의 단축키보다 느리다. 하지만 답장을 쓰는 동안 생각할 시간을 준다. "이 말투가 맞나?", "이 요청이 명확한가?", "상대방 입장은 어떨까?"
Superhuman이 제거한 '마찰'이, 사실은 필요한 '멈춤'이었다.
디자이너 출신으로서 이건 익숙한 패턴이다. 최적화된 UX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 때로는 의도적인 마찰(friction)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 결제 버튼 앞의 확인 단계, 삭제 전 경고 메시지처럼.
Superhuman이 맞는 사람들
그럼에도 Superhuman을 추천할 사람들이 있다:
1. 투자자, VC
하루 300개 이상 이메일 받는 사람들. 실제로 우리 투자자는 Superhuman 없이 못 산다고 한다. 그 정도 볼륨이면 속도가 생존 문제다.
2. 세일즈, 비즈니스 개발
이메일이 곧 매출인 사람들. 응답 속도가 전환율과 직결된다. 30분 더 빨리 답장하는 게 딜을 따내는 것과 놓치는 것의 차이일 수 있다.
3. 키보드 단축키 마니아
Vim, Emacs 쓰는 개발자들처럼, 마우스 안 쓰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 Superhuman은 이메일계의 Vim이다.
4. Inbox Zero 강박증
받은편지함이 비어있지 않으면 잠 못 자는 사람들. Superhuman은 이걸 게임으로 만들어 즐겁게 한다.
나는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냥 이메일을 잘 처리하고 싶었던 PM이었다.
실천: 자기 업무 패턴 파악하기
Superhuman vs Gmail 논쟁은 본질적으로 도구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내 업무에서 이메일의 역할을 이해하는 문제다.
시도해볼 것들:
1. 2주 측정
- 하루 받는 이메일 수
- 하루 이메일 확인 횟수
- 평균 응답 시간
- 3줄 이상 답장 비율
구글 시트에 기록했다. 귀찮지만 패턴이 보인다.
2. 이메일 분류
내 이메일을 4가지로 나눴다:
- 즉시 처리 (승인, 간단 답변): 40%
- 깊은 응답 필요 (의사결정, 피드백): 30%
- 참고용 (FYI, 공지): 20%
- 스팸/광고: 10%
'즉시 처리'가 80% 이상이면 Superhuman 가치 있다. 나는 40%였다.
3. 속도 vs 질 실험
일주일은 최대한 빨리 처리 (Superhuman 스타일), 다음 일주일은 천천히 신중하게 (Gmail 스타일). 뭐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지 본다.
내 경우 후자가 팀 만족도 27% 더 높았다. 슬랙 DM 설문으로 물어봤다.
4. 대안 탐색
Superhuman 아니면 Gmail? 이분법이 문제다.
- Spark: 무료, 팀 협업 기능
- Hey: $99/년, 스크리닝 기능
- Apple Mail + 플러그인: 커스터마이징
나는 결국 Gmail + Boomerang (일정 발송) + Grammarly 조합을 쓴다. 월 $15.
도구는 목적이 아니다
Superhuman은 훌륭한 제품이다. 속도, 디자인, UX 모두 최상급이다. 창업자 Rahul Vohra의 Product-Market Fit 방법론을 존경한다.
하지만 $30/월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10배, 누군가에게는 0.1배.
PM으로서 배운 교훈: 좋은 도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게 맞는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메일 앱은 생산성 스택의 일부일 뿐이다. Notion, Slack, Figma, Linear... 모든 도구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Superhuman은 내 스택에서 불협화음이었다.
디자이너 출신으로서 또 하나: 사용자 경험은 속도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느림이 더 나은 경험을 만든다. 천천히 읽은 이메일, 신중히 쓴 답장, 멈춤 후의 결정.
Gmail이 느린 게 아니라, 내가 빨리 가려고 했던 게 문제였다.
다음 글 예고: "PM이 매일 쓰는 15개 도구 - 월 $127 생산성 스택 공개"
당신의 이메일 앱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댓글로 공유해보자.